아무 기대 없이 보게 되었는데 요런...<살인의 추억> + <조디악> + <추격자>가 뒤섞인 느낌이었습니다.
<살인의 추억>과 <조디악>이 사건 추적자들(형사, 기자)의 심리선을 따라가는 영화였다면, <추격자>는 그 반대편에 선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심리가 주된 묘사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영화 <암수살인>은 두 방향/입장을 아우르며 담담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평행선을 달립니다.
일단, 그 치밀한 균형감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건과 인물에 대한 자료 수집과 기술의 집요함에 압도됩니다.
사건 기술의 밑면에 '당대 정치/사회 시대상의 복각화'를 촘촘하게 깔아 넣은 것만 빼면(<암수살인>은 온전하게 두 인물-살인마 강태오, 김형민 형사-에 집중한다) 이 새로운 형식의 한국산 수사물은 그 기술의 객관적 건조함에서 <조디악>이나 <복수는 나의 것>(이마무라 쇼헤이, 1979)에 버금간다고 생각합니다.
두 인물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세 번째 살인>을 연상시킨다. <암수살인> 역시 '접견실의 영화'라 할 만큼 두 인물 사이의 갈등은 접견실에서 점층적으로 쌓였다, 풀렸다, 폭발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두 인물이 대결하며 서로 겹치기도 하는 <세 번째 살인>과 달리 <암수살인>의 대결은 시종일관 평행선을 달리며 팽팽하게 전개되지요.
그 차이는 접견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거리(<세 번째 살인>의 얼굴 클로즈업 vs <암수살인>의 미디엄/바스트 샷)만큼 벌어집니다.
아마도 <암수살인>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영화의 이야기들이 모두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일 것입니다.
<암수살인>의 힘은 노름판의 화투패를 쪼듯 미스터리를 따라가며 푸는 호기심과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쾌감이 아니라, 절대 악을 마주하고 사투를 벌이는 직업적 소명의식(김형민 형사)의 우직함과 진심을 발견하는 감동에서 발현됩니다.
그 서늘한 감동의 힘은 "세상에서 나 혼자 바보가 되면 그만 아닙니까"라는 김형민 형사의 대사에 집약돼 있습니다.
<암수살인>의 다소 밋밋하고 때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객관적 시선은 극 중반부 이후 서서히 변화합니다.
감독은 관객들이 김형민 형사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끔 유도하는 장면을 점층적으로 끼워 넣습니다.
그러나 일종의 삑사리라 할 수 있는 이 정서적 동조의 편향적 서술(혹은 신파)이 오히려 <암수살인>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악을 물리치는 정의로움' 따위의 정치/윤리적 담론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공포와 억울함에 공감하는 감정적 동요의 과정을 통해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절박함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암수살인을 풀어가는 가장 강력하고 순수한 에너지가 아닐까 싶네요.
그런 점에서 객관적 서술과 정서적 동요가 균형 있게 뒤섞인 <암수살인>은 <살인의 추억> 이후 동어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국판 범죄 수사물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윤석과 주지훈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입만 아픈 일입니다.
두 배우의 차이는 김윤석이 부산 사투리를 좀 더 네이티브에 가깝게 구사했다는 것 정도, 잠깐씩 등장했다 치고 빠지는 충무로 명품 조연들의 '신 스틸' 장면들을 맛보는 것도 <암수살인>을 보는 잔망스러운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그중 백미는 단연코 고창석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고무 잠수복 입기' 스킬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각한 가운데 묘하게 빵빵 터뜨리는 웃음 코드 역시 살짝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랜만에 손에 땀을 쥐게하는 한국식 스릴러 영화 <암수살인>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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