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실화, 배경, 인물 등 알아보기
안녕하세요^^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는 아프리카 북극곰입니다.
미스터 션샤인은 20세기 초 한성,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의병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입니다.
저는 미드와 영드를 즐겨 보고, 한국 드라마는 취향이 아니지만 최근 정주행 한 한국드라마가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 동백꽃필무렵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입니다.
미스터 션샤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99주년을 맞은 2018년 방송되었고, 미국의 이권을 위해 조선에 주둔한 미 해군장교 유진 초이(이병헌)과 조선의 정신적 지주 고씨 가문의 애신(김태리)와의 쓸쓸하지만 장엄한 러브스토리 입니다.
지금부터 미스터 션샤인 뒷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어디까지 실화인지, 역사적 배경은 어떠한지 등을 자세히 풀어보려고 하니 끝까지 정독 바랍니다.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는 실존인물인가?
드라마를 관람하신 분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유진 초이'가 과연 실존 인물일까요?
미스터 션샤인의 역사적 배경은 실제입니다만, 의병을 도우며 장렬히 생을 마감한 유진 초이는 허구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유진 초이의 모델이 된 독립운동가는 있습니다.
바로 '황기환'이라는 분인데요. 이는 1910년 이전의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는 미국 군인 신분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황기환은 프랑스와 영국을 거치면서 미국에서 활동을 하였고 파리한국통신부 서기장과 한국선전단선전국장, 임시정부 외교부 런던주재 외교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미국 현지인과 동일한 영어 실력과 전직 미군이라는 특별한 경력으로 그는 일본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며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데 대단한 역할을 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 마지막회에서 등장한 실존인물인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인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와 같은 외국 인사들을 접촉하여 조선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를 알리고,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황기환
미스터 션샤인 무신회란?
극중 백정의 아들 구동매(유연석)는 무신회 한성지부장로 등장합니다. 무신회의 모델은 실제로 존재했던 '흑룡회'입니다.
흑룡회는 1901년 우치다 료헤이 등 조선에서 활동했던 낭인들이 일본의 대외 침략주의를 위해 조선과 만주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낭인들과 규합하여 조직한 우익 정치 조직입니다.
이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현양사 낭인들의 후예로 의병학살에 앞장섰고, 일진회를 조종하여 한일병합을 이끌어낸 숨은 주역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흑룡회는 1910년 일제 강점 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단체로 성장하였습니다.
흑룡회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학살하는 등의 작전에 앞장서서 활동했던 자들입니다.
우치다 료헤이
흑룡회
미스터 션샤인 글로리호텔
미스터 션샤인 극 중 나오는 글로리 호텔의 실제 모델은 덕수궁 인근에 있었던 손탁호텔입니다.
손탁호텔은 앙트와네트 손탁(1854~1922)이라는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 여성이었습니다. 당시에 많은 서양인들이 호텔을 설립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주목받는 곳이 손탁호텔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할 당시 일본특사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경운궁(덕수궁)과 가깝다는 이유로 며칠을 머물며 조약 체결에 압박을 가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손탁은 1885년 조선에 부임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따라 처음 조선에 왔습니다. 영어와 불어, 독일어 뿐만 아니라 우리말까지 원활하게 구사한 손탁은 훌륭한 언어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여 조선 궁중에서 서양식 요리와 실내장식 등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습니다.
손탁을 거치면서 국왕과 왕비에게 소개된 서양식 관습과 풍물들이 늘어났고, 그는 서울 외교계에 중심이 되었습니다.
손탁은 1897년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기포드가 살던 곳을 매입하여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건물을 짓고 1902년 10월에 호텔 오픈을 했습니다.
손탁호텔은 특정 예약 손님만 투숙하는 황실의 '프라이빗 호텔' 스타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주요 정치인물이나 서울에 주재하는 외국인들의 모임장소로 유명했습니다. 1층은 커피숍과 식당으로, 일반 객실과 거주공간이 있었고, 2층은 귀빈실이 있었습니다.
손탁호텔 전경
미스터 션샤인 이름없는 아무개 의병
최초 의병이 일어난 것은 1894년 일본이 경복궁을 침략하여 무력으로 점령한 사건인 갑오변란 때입니다. 1년 뒤 1895년에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도화선으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무자비한 만행에 분노한 양반 유생들이 중심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또다시 일어난 을사의병,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 체결 및 군대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의병,
이렇게 의병전쟁은 연속해서 일어났습니다.
특히 정미의병 때는 강제로 해산당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들의 조직력과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양반 유생들이 의병장이 되어 평민과 농민들을 이끌고 의병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다 점차 평민과 농민들이 의병전쟁에 대거 참여하면서 농민들 중 일부가 의병전쟁을 치르는 지휘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정미의병 이후에는 해산된 군인과 평면들이 이끌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름 없는 사람들, 즉 평민과 농민 등 민중이 이끄는 의병전쟁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름없는 아무개 의병들은 조직적이고 강력한 군사를 갖고 있는 일본에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학살되거나 진압되었지만,
아무개들이 이끄는 의병전쟁은 이후에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항일독립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의병들의 모습
미스터 션샤인 고종의 예치금 증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던때, 고종은 해외로 망명한 근왕 세력과 헐버트, 알렌과 같은 외국인들을 통해서 밀사 외교를 진행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위해 고종은 황실 재산의 일부를 홍콩 또는 상하이에 있는 외국계 은행에 예치해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고종의 의뢰로 1903년 1월 주한 독일 공사 잘데른 남작이 덕화은행을 경유하고, 베를린 할인은행에 예치한 자금도 그러한 것입니다.
최초에 예치된 자금은 15만 엔 상당의 금괴 23개와 일본 지폐 18만 엔이었고, 다음에는 18,500원과 5만원을 순서대로 예치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비자금은 사라졌습니다. 통감부가 많은 황실 내탕금을 해외 은행에 예치한 것을 알고 1907년과 1908년 동안 고종의 예금 인출 명령서를 위조하여 전액 인출한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고종은 1909년 10월 미국인 호머 헐버트를 시켜 은행에 맡겼던 예치금을 찾으러 갔다가 은행 측으로부터 이미 예금이 인출되었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해방 이후에 다시 한국에 온 헐버트가 이승만 정부에게 독일 채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덕화은행 예치금 증서
미스터 션샤인 의병들의 총
데일리 메일의 종군기자인 프레드릭 아서 멕켄지는 의병들이 사용했던 무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여섯 사람이 다섯 종류의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제대로 쓸만한 총이 없었다. 한 사람은 아주 구식의 낡은 한국 화승총을 들고 있었는데 팔에는 가늘고 긴줄에다 도화선으로 쓰려고 불을 붙여 들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총이 대부분 의병이 사용 중인 무기였다.
두 번째 사람은 구식 한국군의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구식이었다. 또 한 사람은 아주 작은 스포츠용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든 총은 어느것이나 녹이 슬어 있고 부식되어 있었다."
당시 의병들이 주로 사용한 화승총은 유효 사거리가 겨우 20m 정도 되었고, 1발을 쏘려면 몇 분 동안 준비해야 했습니다.
도화선에 불을 붙여 방아쇠를 당기면 화약에 불씨가 붙어 탄환이 발사되는 방식인데, 그렇기에 날씨의 영향이 많을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38식 소총과 기관총을 주무기로 사용하였습니다. 소총은 유효사거리가 360m이고, 분당 8~10발을 쏠 수 있었으니 의병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병들은 유격전과 기습전, 또는 복병전으로 싸워야만 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 극중 애신이 처음에 사용한 총은 '윈체스터 M1894'로 가볍고 휴대가 편리하여 주로 사냥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애신이 나중에 사용한 총은 '모신나강PU'(1930년 생산)로 조준경이 달려 있어 저격용으로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의병들이 사용한 무기
미스터 션샤인 가로등 점등식
우리나라 최초 전깃불이 들어온 날은 경복궁의 건청궁에 전등이 켜진 1887년 2월 10일이었습니다. 이때는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지 불과 8년 후 입니다. 그전에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에서 촛대에 밀초를 사용했었습니다.
당시 가로등 점등식은 그때의 인식 수준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경복궁 건청궁의 점등식을 구경했다는 회고담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양인의 손으로 기계가 움직였는데 연못의 물을 빨아올려 물이 끓는 소리와 우렛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얼마 뒤, 궁전 내의 가지 모양 유리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됐다."
그당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신문물인 전깃불은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넘어 도깨비불과 같이 공포감마저 주었습니다.
구중궁권의 담장을 넘어 거리에 전등이 설치된 것은 1900년 4월이었습니다.
종로 한성전기회사가 생기면서 사옥 주변에 가로등 3개가 설치되었습니다. 이후에 차츰 전등 설치가 늘어났고, 10여 년 뒤에는 서울 시내에 밤에만 여는 야시장이 생겼습니다.
1920년대 후반 종로 모습
미스터 션샤인 을사오적
일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뺏기 위해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빼앗게 됩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주차군사령관인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대신들을 강요하여 조약에 찬성하게 하였습니다.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했습니다.
어전회의에 참석한 8명의 대신 가운데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은 마지막까지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대신들은 내용을 조금 수정하고 조약에 최종 서명하였습니다.
조약에 찬성한 5명은 학부대신 이완용, 외무대신 박제순,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입니다. 그당시에 백성들은 이 5명을 나라를 왜적에게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하며 '을사오적'이라고 칭했습니다.
백성들의 공분의 대상이 된 이들은 미스터 션샤인 극 중 김희성(변요한)이 촬영했던것과 달리 실제로는 기념사진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을사늑약 체결에 참여했던 일본 관료들은 기념사진을 남겨놓았습니다.
미스터 션샤인 여학생을 위한 최초의 학교
극 중 애신이 다녔던 최초의 여학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 그리고 동학사상의 영향으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존재라는 의식이 점차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개화기 여성들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통해 포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1886년 미국 김리교 여선교부에서 온 메리 F. 스크랜턴이 한국 최초의 사립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여학교에 처음 입학한 학생들은 고아나 기생과 같이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남녀가 한 공간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용납이 안되던 때였기에 여성의 교육을 위해 따로 여학교를 설립했어야 했습니다.
결국 여성들은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998년 최초이 여성 인권 선언인 '여권통문(여학교 설시 통문)'에는 이러한 주장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몸이 남자와 다름없이 같은데 안방에 머물러 다만 밥과 술이나 지으리오. 우리도 다른 나라와 같이 여학교를 설치하고 가각 여자아이들을 보내어 재주와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남녀가 일반 사람이 되게 합시다"
이러한 여학교 설립운동에 힘입어 1899년 순성여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조선 여성들만의 힘으로 설립한 최초의 여학교였습니다.
이화학당 학생들
미스터 션샤인 하세가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하세가와는 그 공을 인정받아 1904년 6월에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한국주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외교권 이양과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보호조약 체결을 강압할 때 군대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일등공신은 바로 이도 하세가와였습니다.
윽사늑약 이후, 그가 주로 담당했던 주요 임무는 의병 색출 및 학살이었습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부재중일 때 통감 대리의 지위를 가지기도 했는데, 대민 작전에서 의병들을 발견하는 즉시 즉결 처분하는 극단적인 잔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공로로 승진하여 그는 1915년 일본 육군 원수로 승진했고, 백작의 작위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1916년 10월 데라우치의 후임으로 조선 총독의 지위에 오른 하세가와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약 헛된 소문으로 민심을 혼란시키는 자가 있으면 총독 직권으로 예외없이 엄중 처분한다"고 밝히며 강경 진압을 예고했습니다.
결국 3.1운동 시작때부터 총격이 시작되었고, 전국에서 피바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은 제대로 대처못하고 막지 못하여 하세가와는 불명예 퇴진한 첫 번째 총독이 되었습니다.
2대 총독 하세가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미스터 션샤인 마지막회 의병 사진
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회에 등장한 의병사진 촬영 씬이 화재가 되었습니다.
1907년 의병들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던 때, 데일리 메일의 종군기자인 프레드릭아서 맥켄지가 경기도 양평에서 만난 의병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맥켄지의 저서인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 실려 있습니다.
맥켄지는 의병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5~6명의 의병들이 내 앞에 서서 경례를 했다. 18세부터 26세까지의 청년들이었다. 한 사람은 정규 한국군의 군복을 입고 있었고, 한 사람은 작업복을, 이외 2~3명은 보잘것 없는 낡은 한복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손으로 짠 광목으로 만든 탄대를 차고 있었으나 실탄은 반밖에 없었다. 여섯 사람이 다섯 종류의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제대로 쓸 만한 총이 없었다."
이 사진 속에 어떤 아무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어야 할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소. 일본의 노예로서 생명을 부지하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요."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사진 속 주인공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이제라도 일제의 총칼 앞에 의연히 산화한 수많은 이름 없는 아무개 의병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상 지금까지 미스터 션샤인 역사적 배경과 인물, 실화 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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